윤석열 측의 주장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에 집중하고 있어요. 계엄은 경고성이었고, 국회를 막으려 한 적도 없고, 포고령도 집행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탄핵과 내란죄 프레임은 민주당의 정치 공작이며 자신은 피해자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은 설득력이 거의 없습니다. 윤석열 측이 입장을 밝히는 대로 이를 반박하는 진술이 나오고 있어요.
극우세력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어요. 국민의힘에서 온건파로 분류되던 이들도 집회를 방문하고, 비공식적으로라도 예배에 참석하며 연결고리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영향력을 고려할 때, 전광훈 목사로 대표되는 극우세력은 더 이상 무시할 수 있는 ‘소수’가 아닙니다.
그들이 대표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우리’와 ‘그들’을 구분짓게 됩니다. 계엄부터 탄핵 정국을 지나오며 ‘이해할 수 없는 그들’에 대한 분노는 커져만 갔습니다. 소수의 일탈이라며 무시하기엔 그들이 보여준 행태가 너무나 충격적이었고, 국민의힘이 속절없이 끌려가는 모습 역시 실망스러웠죠. 거짓과 왜곡이 난무하는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선동에 나선 세력이 득세하는 과정을 보면서 이미 지쳐버린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역사는 이들이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우리’는 영원히 ‘그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 역사가 반복될 겁니다. 설득을 포기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그러나 공존을 포기할 순 없습니다. 반대 세력을 잡아들여 섬에 몰아넣는 일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고,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양극화된 정치를 해결할 마법 같은 해결책은 없을 겁니다. 개헌도, 다당제도 한 번에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습니다. ‘그들’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당장은 제도 정비와 마음가짐 정도의 얘기밖에 드릴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최소한의 규칙은 함께 지킬 수 있도록 제도의 허점을 정비하고, 기준을 벗어난 행위를 억제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처벌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지치지 말아야 합니다. 규칙을 지키거나 바꿀 것을 얘기할 때는 지속성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문제에서 잠시 벗어나 ‘우리’의 성취, 앞으로 나아간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다. 지금과 다른 시공간에서 누군가는 ‘그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해냈습니다. 그 이야기를 꺼내보며 영감을 얻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시대를 건너가는데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