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만의 덫에 빠진 민주주의> 데이비드 런시먼 ⓒ후마니타스
<자만에 덫에 빠진 민주주의>를 읽으며 저의 민주주의에 대한 전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정치의 역할도 런시먼의 주장을 토대로 다시금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느끼게 됐어요.
그래서 이 책의 주장을 도구 삼아 민트 님과 김동욱 님이 남겨주신 의견을 함께 읽어보려고 합니다.
두 분이 공유하는 키워드는 이념과 정책인 것 같습니다. 민트 님은 직접 언급해주셨고, 동욱 님의 의견은 전두환 사면이라는 정책과 그에 따른 사회적 정의, 즉 이념의 조형을 평가하신 것으로 읽었습니다.
런시먼은 책에서 다양한 정책의 사례를 다루었습니다. 각 정책의 이념적 성격보다는 정책 결정 과정에서 발생한 상황에 집중했는데요.
이 책만으로 파악하자면 런시먼은 민트 님처럼 정책은 ‘이념의 현실화’보다는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라고 보는 듯합니다. 결국 정책이 당시의 상황에 시기적, 내용적으로 적합했는지를 중심에 두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더 나아가서 ‘현실에 맞는 정책을 어떻게 만들 수 있나?’ 그리고 ‘현실에 맞는 정책은 무엇인가?’라고도 질문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런시먼은 이 질문들에 답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금까진 그럭저럭 해왔다’고 말할 뿐입니다. 바로 이 ‘그럭저럭’이 자만의 원인이 되는, 떼어낼 수 없는 민주주의의 본성이지만요.
당장 눈 앞에 닥친 위기를 모면하는데 급급한 민주주의는 정책의 이념적 방향성을 진지하게 따질 여유가 없겠지요. 선거가 가까운 상황에서 위기가 발생하면 더욱 그렇고요.
민주주의는 단기적으로 좋아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좋지 않은 결정으로 향하기 쉽습니다.
런시먼은 이러한 방식으로 발생하는 위기를 막기 위해 정부의 역할에 제약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한 경제학자를 언급합니다. 시장의 자유를 철저하게 옹호한 하이에크입니다.
하이에크는 민주주의가 자제력을 배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그가 보기에 ‘위기를 인식할 수 있는 민주주의’는 현실적이었고, 따라서 신자유주의 정책은 현실에 맞는 정책이었습니다. 현실에 맞는 정책을 만드는 방법이 바로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이고요.
런시먼은 하이에크의 이러한 인식을 두고 “장기적 관점을 고집하는 것도 일종의 근시안”이라고 말합니다. 하이에크가 장기적 관점을 중시한 탓에 민주주의의 현실을 오해했다는 거죠.
민주주의의 현실에 기반한 런시먼의 정책 평가에는 이념도 정의도 없습니다. 다만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민주주의의 본성이 있을 뿐입니다.
결론은, 앞으로의 민주주의 역시 위기를 헤쳐나가면서도 실수를 통해 배우지 못할 것이며, 그 결과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위기가 올 수도 있다는 겁니다.
허탈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허탈한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다릅니다. 민주주의는 최선을 다해도 ‘그럭저럭’ 굴러간다고 하지만 그 ‘그럭저럭’을 유지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때에 따라 유연하게 움직이려면 선악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거나, 무책임하게 여론을 따라서는 안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민주주의의 결점은 극대화되고 치명적 실수의 가능성은 높아질 테니까요.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지킬 가치가 있는 고귀한 것으로 여겨지곤 하죠. 특히 한국의 경우 수많은 희생을 통해 얻은 것이고,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의 기반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런시먼은 민주주의가 ‘당연히 옳다’는 생각이 무모함과 체념을 동시에 낳는다고 말합니다. 이를 우리의 키워드에 적용해보자면,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은 민주주의 사회의 정책과 사회적 정의 실현에도 적용될 겁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현실적이고 무엇이 옳은지 말하기 전에, 우선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깨야 하지 않을까요?
두 분의 의견에 런시먼의 이야기가 다른 가지를 내었을지 궁금해하며 올해 마지막 에디터노트를 줄입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시길 바랍니다.🎄